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우크라이나 관계 (문단 편집) === 소련 해체 이후 === 소련 해체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즉시 지지했으며 키이우에 대사관을 설치함으로써 양국간 관계는 재편성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잔존해있던 구 소련의 핵무기를 우크라이나가 해외에 판매하려는 시도하는[* 예를 들어 1992년부터 재임한 우크라이나의 3대 제1부총리 이호르 유흐노우스키(Ігор Юхновський)는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핵무기를 국제 경매에 내놓아 가장 비싸게 부르는 국가에 팔겠다("We can sell these nuclear warheads to the highest bidder (among) nuclear states. That means Russia first of all, or maybe another state, depending on which pays most")고 공식적으로 선포할 정도였다[[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92/11/06/ukraine-having-second-thoughts-about-giving-up-nuclear-weapons/c24d8170-8464-4dc8-b1ce-e00276e2fa72/|#]]] 등 우크라이나가 기성립된 국제 핵질서를 교란에 빠트릴 위험에 있자 미국은 넌-루가 협력적 위협 감소(Nunn–Lugar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CTR) 프로그램을 통하여 구소련 영역내 존재하는 이들 핵무기의 감소를 대가로 이들 국가에 막대한 양의 경제적 지원을 실시하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받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된다. 훗날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약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성, 현재 국경선을 존중한다 >2.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자제한다(refrain) >3.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 >4.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는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다 >5.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자제한다 >6. 상기 조항에 변경이 있으면 따로 협의한다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체결되던 1994년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상대로 [[크림반도]] 독립과 흑해함대 분할 논쟁[[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3819&cid=42147&categoryId=42147|#]]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은 러시아군의 흑해 진출 요충지로서 소련 해군의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림반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절대 잃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양자간 갈등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러시아가 [[세바스토폴]]을 임차하면서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가짐으로써 1997년 평화적으로 종식되었는데, 이는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현존 국경선(the existing border)을 이미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우호조약(Friendship Treaty)을 체결한다. 훗날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군사 위협이 현실화되자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핵포기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위협받는 약소국으로 전락되었으니 미국과 영국이 이에 대한 방위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었는데 이는 대충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의 의도에 반해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즉시 서방의 위협이 됐습니다. 1900개의 [[핵탄두]]와 2500개의 [[전술핵|전술 핵무기]] 보유한 핵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사일 개발 능력도 탁월해서 1962년 쿠바에 배치됐던 소련 미사일이 모두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됐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중국, 프랑스, 영국을 넘어서는 3번째 핵보유국이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가 당시 미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핵을 제거하거나 러시아로 옮기자는 데에 러시아와 미국의 이해가 모처럼 일치하게 된 거죠. 미국은 차라리 러시아가 핵을 갖고 있는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92년 5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충돌합니다.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함대 문제로 양 측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심각한 안보위기를 느낀 우크라이나는 핵 미사일을 포기하는 댓가로 경제 지원, 공식 영토 확정, 안보 보장 등을 요구하게 됩니다. > > 이후 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러시아, 영국,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합니다. 핵을 포기하는 대신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양해각서]]'였을 뿐 구속력있는 '[[협정]]'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안전보장 협정'이었다면 러시아가 이를 어기면서까지 2014년에 크림반도를 침공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압박이 거센 상황에서 여기에 서명 안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핵위험이 사라진 우크라이나는 이제 더이상 미국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별다른 안전보장 장치 없이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이게 된 우크라이나는 국내 정치적으로도 혼란을 겪었고, 점점 러시아가 눈독들이기 좋은 상황으로 빠져 늘어갔습니다. > >(중략) > >우크라이나가 핵 포기의 댓가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요구했을 때, 미국이 이를 들어줘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더라면 우크라이나의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ode=LSD&mid=shm&sid1=001&oid=214&aid=0001165487|#]] 하지만 이는 당시의 부다페스트 각서가 체결되던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생략한 채 사후적으로 나오는 평가일 뿐이다. 당시 부다페스트 각서에서 언급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Assurance)'은 당시 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림반도와 흑해함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러시아가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안전과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인정(Assurance)하는 맥락에서 넣은 것일뿐 애초에 본 각서의 목적 자체는 장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공격받을 때 미국과 영국에게 지켜달라고 요청하여 체결한 각서가 아니다.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주민이 비중이 높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에 그렇게 큰 위기감을 느꼈다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른 국가들([[폴란드]], [[체코]])처럼 서둘러 나토에 가입하여야 했겠으나 아래에서 보듯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나토 가입 여론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위의 각서 내용을 보더라도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자제한다(refrain)[* 금지도 아니고 그냥 자제]'라고만 당위적으로 선언하고 있을뿐 누가 공격하고 누가 지켜주는지,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는 구체적인 방안이나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았을 때 이를 보복하기 위한 어떠한 조문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법학자들의 해석도 이와 같이 이 각서가 각서 당사국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https://www.france24.com/en/20140303-ukraine-us-uk-diplomacy-russia-budapest-memorandum|#]][[https://www.ejiltalk.org/the-budapest-memorandum-and-beyond-have-the-western-parties-breached-a-legal-obligation/|#]]. 상기의 기사에서는 본 각서의 목적인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에 대하여 '안전이 위협받을 때,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정도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다'는 입장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2009년 당시 NATO에 주재하던 우크라이나 대표 볼로디미르 바실렌코는 우크라이나 국내 언론과의 [[https://day.kyiv.ua/en/article/close/assurances-without-guarantees-shelved-document|인터뷰]]에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자체에 큰 권위를 부여하여 이상화하는 우크라이나 국내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각서상의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이 안전 보증(Security Guarantees)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외교적 보장(Assurances)이 현재 상태의 완전함을 선언하는 것일뿐이라면 보증(Guarantees)은 미래에도 그 완전함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약속하는 개념으로서[* 실제로 영어에서의 의미도 이와 같다[[https://wikidiff.com/assurance/guarantee|wikidiff 참조]]] 각서에서 말하는 보장(Assurances)은 각서 체결 당시(1994년)의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이 완전함을 확인(Assurances)한 것일뿐, 미래에 그 주권과 국경선이 침탈받는 경우에도 미국과 영국 등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의 완전함을 적극적으로 회복시켜준다는 의미의 보증(guarantee)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볼로디미르 바실렌코의 인터뷰에서도 표현되듯,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NATO측이 NATO 가입을 서두른 이유 역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우크라이나의 미래 안전에 그렇게 실효성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위기의식 때문도 있다. 즉, 당시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각서가 체결되던 시점에서 요구했던 것은 독립 당시 확보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을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인정(Assurances)하는 것이었지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러시아(혹은 미국, 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안전장치인 군사적 보증(guarantee)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러시아]]는 [[돈바스 전쟁]] 당시 NATO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포기하여 러시아의 안전을 법적으로 보증하라(legal guarantees)고 명확히 요구하였다[[https://www.rferl.org/a/russia-putin-nato-guarantees-ukraine/31608926.html|#]]. 국내 기사에서는 부다페스트 각서든 러시아 발표든 전부 '보장'이라고 번역했지만 둘은 명백히 다른 말이다]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이후에도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는 그렇게 개선되지 않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당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적도 없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라였던 반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미국보다 러시아와 더 큰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8년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주도로 [[이란]] 부셰르(Bushehr)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란]]이 미국의 적성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길이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은 미국대로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 우크라이나에 핵 발전소를 지어주고도 우크라이나가 이를 군사적인 방향으로 전용할까봐 '미국과 우크라이간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협정(Agreement for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Ukraine Concerning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을 맺으며 우크라이나를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폴란드]] 등 구소련의 위성국가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립 직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서둘러 가입하던 것에 비하여 우크라이나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사무소를 차리던 당시(1997년) 우크라이나내 나토 가입 여론은 찬성 37%, 반대 28%, 미결정 34%로서 그렇게 뜨겁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렇듯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주민들이 많이 살아 친러성향이 높았는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예를 들어[[https://en.wikipedia.org/wiki/Russia%E2%80%93Ukraine_relations#Economics|#]] 1997~2000년 기간중 우크라이나의 대러시아 수출비중은 23~26.2%였고 대러시아 수입비중은 45~50%에 달했다. 특히 가스의 70~75%, 석유의 80%를 러시아에서 수입할 정도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해군까지 상시 주둔하는 상황이라 우크라이나가 공공연한 반러 정책을 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미국도 우크라이나와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유의미한 공식 외교관계는 1996년에 양국이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쉽(strategic partnership) 하나가 전부였을 정도. 이런 미국-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서 부터이다. 군사행동을 통해서라도 독재국가에 미국적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네오콘]]이 장악한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의 뜨뜬미지근한 대우크라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 역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는데 [[레오니드 쿠치마]]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이라크에 파병을 하면서까지 미국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언론인을 구소련식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미국의 적이었던 [[사담 후세인]]에게 군사장비를 팔아먹는[* 이를 카세트 스캔들(Cassette Scandal)이라고 한다]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적극적 구애공세에 결국 우크라이나는 200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대한 가입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고 [[오렌지 혁명]]으로 대통령으로 집권한 친서방파 정치인 [[빅토르 유셴코]]는 더더욱 NATO 가입의지를 피력하였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의 국내 여론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에 점점더 부정적이었고 반미-친러 성향이 짙어졌는데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과 금융위기 같은 실정으로 미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매우 낮았다는 점과 [[빅토르 유셴코]]로 대변되는 친서방파가 무능으로 민심을 잃은 결과로 풀이된다. [[파일:nato_uk_survey.jpg|width=60%]]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NATO 가입 설문조사[[https://en.wikipedia.org/wiki/Ukraine%E2%80%93NATO_relations|#]]. 2013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내에서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이유는 우선 지리적으로 북유럽이나 중유럽보단 동유럽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토 대부분이 탁 트인 평야지대여서 러시아가 침공할 겨우 드네프르 강 외에는 이렇다 할 자연적 방어물이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긴밀히 경제교류를 하였으므로 이 점도 고려해야 했다. 반면에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은 비록 탁 트인 평야지대여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을지라도 바다 건너 인접한 [[스웨덴]], [[핀란드]]와 교류하는 것이 경제발전에 유리했고, 따라서 에스토니아인들은 러시아와 협력하기보단 강경 친서방-반러 성향을 띄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도 우크라이나의 대외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외노선을 친러로 할것이냐 친미로 할 것이냐에 대해 우크라이나 사회는 오랫동안 갈등에 휩싸여왔다. 이 갈등은 우크리이나의 민족정체성 문제, 지역갈등 문제와 결합되어 해결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변하고 2014년에는 끝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친러 여론은 급격히 세가 줄어들었다.], 또한 러시아와 인접하여 민일 NATO에 가입을 시도하거나 실제로 가입할 경우 오히려 러시아의 위협이 가중되어 역설적으로 안보가 더욱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토 역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입지[* 국토 대부분이 탁 트인 평야 지대인 동시에 영토가 동서로 긴데, 동쪽은 러시아와 북부는 러시아/벨라루스와 접한다. 서쪽의 헝가리 등 중유럽 국가들과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존재로 인해 교통이 좀 더 불편한 편이다.]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가입을 원한다 해도 제스처만 취하던 상황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지만 2006년 우크라이나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했던 최초의 합동 해상훈련(see breeze)이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취소되는 등[[https://en.wikipedia.org/wiki/2006_anti-NATO_protests_in_Feodosia|#]] 민심은 녹록치 않았다. 실제로 2012년 부시 대통령 임기 종료 직후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실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미국 리더쉽에 대한 신뢰도는 33%로서 유럽 국가들 중 중하위권에 속하는 수준이었으며[[http://www.gallup.com/file/poll/161309/US_Global_Leadership_Report_03-13_mh2.pdf|#]] 2008~2009년 당시 구소련국가들의 국민들 대상으로 '러시아'와 '미국'중 양자택일의 상황이 오면 어느 국가를 선택하겠느냐는 문의한 설문조사[[https://news.gallup.com/poll/127334/kyrgyzstanis-favor-russia.aspx|#]]에 따르면, 러시아를 버리고 미국을 택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겨우 12%에 불과하여 미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 44%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우크라이나 함께 나토 가입을 줄기차게 요구한 [[조지아]]만 하더라도 동일 조사에서 미국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24%,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28%로 비등한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당시 대미 성향이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파일:us_uk_survey.jpg|width=60%]]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상당히 많은데다가[* 1989년 기준 1200만여 명, 2001년 통계 기준으로 8,334,100명인데, 현재 새로 통계가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크림 반도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문제 등등으로 과거에 비하면 대폭 감소했겠지만 현재도 상당수가 남아있다.] 우크라이나인 중에서 과거 같은 [[소련인]]이자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결혼한 사람이 많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러시아인들 중 우크라이나인 친척이 없는 사람이나 우크라이나인중 러시아인 친척이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 편이기도 하다.] 지리적인 이유([[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서로 국경을 상당부분 맞대고 있다.]])까지 겹쳐서 반러 정권이 마냥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도 힘들다. 제스처만 열심히 취하고 적극적인 지원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최대한 회피하는, 우크라이나 친서방파 입장에서는 복장 터지는 상황이다. 상술한 것처럼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이다. [[미국 유대인]]들이 적극적인 로비로 미국에 친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강요하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 역시 [[아르메니아]]를 위해 사활을 걸고 로비를 상황과 다르게,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포그롬|반유대주의 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보니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다. 일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있지만 미국 정계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력은 결코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 비할 바가 못된다. 이는 미국이 심각한 외교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지지하거나, 실익이 없음에도 불구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한 것과 다르게, 리스크를 무릅쓰고 우크라이나 친서방 세력을 제대로 지원할 가능성이 더더욱 줄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별로 애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 기준으로는 서로 증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장본인 중 한 명인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이고, 같은 배경의 트로츠키 역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일개 방언에 불과하다."라는 망언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손꼽히는 부쿠레슈티의 나토 정상선언문[[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europe/2021/12/09/H6SNBS3WJRB5DIUDWHL5AFZ4KU|#]]이 2008년 발표된다. 이 선언문 23조에서 NATO는 “조지아,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나토 가입 염원을 환영하며, 나토의 외무장관들이 (가입 절차의) 다음 순서인 멤버십행동플랜(MAP) 적용 시기를 결정한다"라고 명시한다. 당시 임기말이었던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하루빨리 나토에 가입시키고자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로드맵을 요구했으나 [[러시아]]의 반발을 우려한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최종본과 같이 가입만을 약속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자국의 앞마당인 우크라이나가 언제든지 나토로 넘어갈 수 있다는 무제한의 불안감이 러시아에 심어진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내 친러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친서방파의 무능에 지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2010년 선출함에 따라 미국과 우크라이나간 관계는 다시 한 번 멀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역학구도는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